
BRUTUS 취재팀은 2주 동안 서울, 진주, 부산, 제주, 전주를 종횡무진 누비며 한국 곳곳을 담아냈습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한국 콘텐츠와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많은 이들이 한국을 찾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진짜 한국’을 알고 있을까요?
그런 물음에서 출발한 이번 특집은 화려한 SNS 이면에 숨겨진 낯설지만 매력적인 한국의 장면들을 담았습니다. 지면에 다 담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지금 Ascètique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2025년 4월 25일에 진행된 아세티크 디렉터 하상욱씨와 BRUTUS 매거진의 담당 에디터 마사노부 시미즈(Masanobu Shimizu) 씨의 토크 세션을 바탕으로 정리한 대담 내용입니다.

HA : 한국에서도 예전부터 많은 분들이 BRUTUS 잡지를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아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BRUTUS는 어떤 잡지인가요?
SHIMIZU : BRUTUS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팝 컬처 종합지”라 할 수 있습니다. BRUTUS는 특정한 주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음식, 여행, 예술, 건축, 음악, 영화는 물론 곤충이나 광물처럼 예상치 못한 주제까지 폭넓게 다뤄왔습니다.
1980년, POPEYE의 형제지로 창간된 BRUTUS는 지난해 통권 1000호를 맞이했습니다. 발매일, 로고 위치, 제본 방식 등 잡지의 형식이 40여 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은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또한 패션 잡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루이비통, 구찌, 에르메스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광고를 유일하게 게재하는 잡지이며 무라카미 하루키, 사카모토 류이치, 스튜디오 지브리를 특집으로 다룬 유일한 잡지이기도 합니다.
BRUTUS는 보통 한 권을 1~2명의 편집자가 책임집니다. 회의도, 프레젠테이션도 없이 모든 것을 편집자의 감각과 개성에 맡기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BRUTUS는 편집자의 색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매우 독특한 잡지입니다.


HA : 일본에서는 잡지가 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해왔고 일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잡지 문화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SHIMIZU : 일본의 잡지 문화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2000년대까지는 잡지가 유행을 주도하고 기록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정말 다양한 주제의 잡지가 발행되는데요, 예를 들어 자동차 차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도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처럼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잡지가 존재하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콘텐츠의 퀄리티도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잡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해외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POPEYE와 BRUTUS는 그러한 흐름의 시작점에 있었죠. 잡지는 텔레비전과 달리 비교적 적은 인원으로 제작이 가능합니다. 사진가와 편집자만 있으면 하나의 잡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흥미로운 정보를 발굴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다채로운 정보가 일본 잡지에 모이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HA : 과거에는 일본의 선진 문화가 한국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 문화를 흥미롭고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낸 한국 문화의 매력은 어떤 부분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SHIMIZU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의 콘텐츠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정제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콘셉트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작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에서는 다소 약한 면이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한국의 콘텐츠는 다양한 요소를 가볍고 유연하게 믹스하면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행력을 바탕으로 순수하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는 한국 문화의 큰 강점이며 일본인들에게도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HA : 이번 한국 특집호를 준비하며 한국의 여러 지역을 직접 취재하셨습니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도시들을 방문하셨는데 한국의 지역 문화에 대해 느낀 점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SHIMIZU :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잘 발달된 식문화였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일본 내에서도 흥미로운 지역에는 그곳만의 독특한 식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점에서 한국 역시 지역마다 고유한 식문화가 다양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HA : 그렇군요, 일본은 오래전부터 지역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적 지원을 통해 지역 발전을 이뤄왔습니다. 콘텐츠를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셨을 때 한국의 지역 문화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무엇인가요?
SHIMIZU : 일본에서는 2000년대 무렵부터 ‘지방 이주’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도쿄에 모든 것이 집중된 문화였지만 버블 붕괴 등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 지방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정부 또한 ‘지방 창생’을 주요 정책 기조로 삼고, 관련 예산을 투입하며 이러한 흐름을 지원해왔습니다. 물론 지방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창작자들에게는 자신만의 속도와 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 지방의 환경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흥미로운 도시로는 모리오카, 가고시마, 가가와, 도야마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HA : 일본 문화는 예로부터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특히 예술, 패션, 건축 등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요. 일본 문화가 지닌 힘과 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SHIMIZU : 이건 취재 중 하상욱 디렉터님이 추천해 주신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읽고 느낀 점인데요, 일본 사람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부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나라였다면 그런 디테일에까지 신경 쓰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여겨져 쉽게 넘어갔을지도 모르죠. (혹은 아예 배제되었을 수도 있고요.)
일본에는 “아름다움은 디테일에 깃든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요소일수록 오히려 더 본질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고 믿고 그에 정성을 기울이는 태도에서 일본 문화의 미학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오타쿠 문화 역시 그런 집요한 디테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HA : 팬데믹을 지나 탈세계화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협력하고 교류하며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상호 존중을 실천해 나갈 수 있을까요? 콘텐츠를 만들고 취재하는 입장에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SHIMIZU : 최근 몇 년 사이, 한국과 일본의 크리에이터들 간 교류가 정말 활발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이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또 서로의 강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장점들을 더 많이 나누고, 함께 공유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SHIMIZU : 요즘 일본에서는 음식, 패션, 음악, 영화, 드라마, 디자인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습니다. 이번 특집을 기획하게 된 주요한 배경이기도 한데요, 실제로 한국에 머무르시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체감하고 계시나요?
HA : 네, 물론입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 콘텐츠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작년과 올해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했었는데요, 단순히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SHIMIZU : 또한, 한국 콘텐츠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HA : 한국 콘텐츠는 다양성과 에너지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한국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 자기화하는 능력,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빠른 네트워크를 통해 전 국민이 공유한다는 점이 한국 콘텐츠의 가장 큰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지속 가능한 콘텐츠 개발과 보다 깊이 있는 접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SHIMIZU :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한국 문화에,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서로 높아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HA : 역사적으로 보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중학교 시절, 밀수된 일본 패션 잡지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80-90년대 조용필이나 2000년대 욘사마 열풍은 특정 세대의 특정 인물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요즘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가끔 일본 친구들이 한국을 찾아와 만날 때면,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심지어 존경까지 느껴질 때가 있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양국 예술인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류를 통해 탄생하는 콘텐츠가 기존과는 또 다른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SHIMIZU : 그리고 현재 일본 콘텐츠에 대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나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HA : 저는 일본 콘텐츠가 얄미울 정도로 그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답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부흥기 동안에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문화의 부흥을 이끌며 깊이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다음 세대에 전했습니다. 버블이 꺼진 이후, 일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도 예전만큼의 수요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런 고민의 시간을 거치며, 일본 콘텐츠는 디스토피아적인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해왔고, 지금의 일본 콘텐츠는 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규모를 줄이고 선배 세대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화해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려는 콘텐츠가 있는가 하면,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지나치게 노골적인 홍보 중심의 콘텐츠도 공존하는 것이 현재 일본 콘텐츠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SHIMIZU : Ascétique는 한국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문화에 기여하고 영향을 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HA : 아세티크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는 라이프 스타일숍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일반적인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최대한 독립적인 환경에서 저희의 가치관이 온전히 담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깊이 있는 접근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합니다.
라이프스타일 숍으로서 아세티크는 가능한 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해석이나 편집은 고객의 몫으로 남기려 하기 때문에 때로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다루는 모든 물건들은 이미 해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거나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것들입니다. 지금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름다움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역사적인 인물들의 방 한켠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모두가 쉽게 받아들이고 즉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물건을 권해야 할 때에도 저희는 그 이면에 담긴 숨은 이야기와 미학을 함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물건 하나로 그 사람을 알 수 있길 바랍니다.


SHIMIZU : 일본에서는 코로나 이전부터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방식의 창작 활동과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HA : 물론입니다. 대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이동해 자신의 속도에 맞춰 작업을 이어가는 분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지역에 정착해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이 관광 자원으로 발전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흐름에는 고속철도나 저가 항공 등 교통 인프라의 발전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도나 강원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고요. 앞으로도 이런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SHIMIZU : 그렇다면 아세티크의 기반이 된 도시, 진주만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또한 그곳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해가는 과정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도 함께 들려주세요.
HA : 진주는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의 도시입니다. 도시 한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지리산과 남해가 가까우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기에도 교통이 편리합니다.
지역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콘텐츠를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대도시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콘텐츠도 이곳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실험하고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가 좋은 콘텐츠를 찾아 대도시나 해외로 나가는 것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저는 콘텐츠는 결국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콘텐츠를 만들 때, 진주의 어떤 중년 남성이나 20대 여성, 주부, 학생들을 떠올리며 작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희는 진주 안에서도 홍보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라서 어떤 날은 오히려 진주보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한 발자국 물러서 묵묵히 콘텐츠를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진주 분들이 이 커뮤니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SHIMIZU : 이번에 전주도 함께 취재했는데 그곳에서도 20대 청년들이 도시의 문화를 바탕으로 매우 흥미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Ascétique처럼요.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한국의 지역 문화나 지방의 창작 생태계에 대해 어떤 가능성을 느끼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HA : 한국은 이미 서울과 그 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영향력은 인천과 경기도까지 뻗어 있어 한국 문화 전체가 곧 서울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울은 숨겨진 계급주의와 철저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은 기득권자의 도시이며, 새싹처럼 신선하고 여린 콘텐츠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생각하는 서울의 멋진 친구들조차 높은 임대료 부담 때문에 매장을 열기 어려워하고 팝업 스토어 형식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지역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지역 문화는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멕시코시티를 방문했을 때, 동네 카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가볍게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 하기 전 잠깐 들러 커피와 빵을 사곤 했습니다. 그런 일상 속에서 마주한 그들의 얼굴에서는 외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서울처럼 과밀화된 도시나, 반대로 인구 감소로 쇠퇴해가는 지방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런 공간들이 존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지역 문화는 단순한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 적극적인 지원과 노력을 통해 쟁취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 역시 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SHIMIZU : 저에게 한국의 풍경은 종종 영화 속 장면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도시의 풍경처럼요.
당신에게는 어떤 풍경이 ‘한국적’이라고 느껴지시나요?
HA : 솔직히 앞선 질문들에 답하면서는 다소 무겁거나 의무감이 드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만큼은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평소에 영화를 자주 보는 편입니다.(자주 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데, 특히 에릭 로메르와 미아 한센 뢰브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함께 만들어주신 시미즈 상도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짧게나마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질문에 답하려다 보니 시미즈 상이 좋아하는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과 이창동 감독, 홍상수 감독의 비교적 최근 작품들을 다시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미즈 상이 좋아하는 감독들은 소외되거나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풀어냅니다. 그래서 그곳의 풍경에는 꾸밈이 없습니다. 시미즈 상이 본 한국 영화의 장면들은 그들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한 단면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들이 바라본 한국은 소외되고 사라져갈 것들로 이루어진 어딘가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며 있는 풍경입니다. 그래서 문득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그런 한국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은 명절이면 참기름 짜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시장 사람들이 하루 종일 악다구니를 벌이다가도 저녁쯤엔 술 한잔에 취해 모든 걸 웃으며 넘기던 그런 정 많고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한국은 한동안 인적이 드물더니 요즘은 유난히 더 썰렁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끔 새벽이면 ‘과연 내 동생들과 자식들은 어떤 내일을 마주하게 될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곤 합니다. 과거 북적이던 시장통의 소란함도 지금의 스산한 거리의 차가움도 모두 한국적인 풍경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작은 희망을 쫓는 평범한 사람들이 한국적인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 에릭 로메르, 미아 한센 뢰브, 켈리 라이카트)
모두가 한국을 이야기하는 2025년.
이제는 하루라도 한국 콘텐츠를 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 ‘제4차 한류 붐’이라 불린 지도 벌써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YouTube와 SNS는 그동안 한국에 관심 없던 이들에게까지 콘텐츠를 전하고 TV와 신문은 정치와 엔터테인먼트를 다루며 Netflix의 한국 드라마는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NJZ(구 뉴진스)는 K-POP 팬이 아니던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이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고 해외여행지로서의 인기도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은 세대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흥미롭고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렇게 흥미로운 이웃나라가 있었구나’ 하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 역시 그런 깨달음을 느낀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번 특집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다시 돌아가 보고자 했습니다.
시차도 없고 도쿄에서 단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한국은 분명 일본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입견이 생기기 쉽고 오히려 사소한 차이점에 더 눈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2주 넘게 한국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여러 번 방문했던 저 자신조차도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라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특집에는 여행 가이드 정보도 많이 담았지만 해외 도시 특집으로는 드물게 텍스트 중심의 구성으로 제작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최대한 정성스럽게, 그리고 key Person들의 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페이지를 구성했습니다.
시간을 들여 읽어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한마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 영상 제작자인 이랑 씨가 인터뷰 중 들려준 말입니다.
「韓国に夢を抱かないでください」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지 마세요.
이 말은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들렸습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솔직한 이야기였고, 그것 또한 한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을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BRUTUS 취재팀은 2주 동안 서울, 진주, 부산, 제주, 전주를 종횡무진 누비며 한국 곳곳을 담아냈습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한국 콘텐츠와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많은 이들이 한국을 찾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진짜 한국’을 알고 있을까요?
그런 물음에서 출발한 이번 특집은 화려한 SNS 이면에 숨겨진 낯설지만 매력적인 한국의 장면들을 담았습니다. 지면에 다 담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지금 Ascètique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2025년 4월 25일에 진행된 아세티크 디렉터 하상욱씨와 BRUTUS 매거진의 담당 에디터 마사노부 시미즈(Masanobu Shimizu) 씨의 토크 세션을 바탕으로 정리한 대담 내용입니다.
HA : 한국에서도 예전부터 많은 분들이 BRUTUS 잡지를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아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BRUTUS는 어떤 잡지인가요?
SHIMIZU : BRUTUS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팝 컬처 종합지”라 할 수 있습니다. BRUTUS는 특정한 주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음식, 여행, 예술, 건축, 음악, 영화는 물론 곤충이나 광물처럼 예상치 못한 주제까지 폭넓게 다뤄왔습니다.
1980년, POPEYE의 형제지로 창간된 BRUTUS는 지난해 통권 1000호를 맞이했습니다. 발매일, 로고 위치, 제본 방식 등 잡지의 형식이 40여 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은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또한 패션 잡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루이비통, 구찌, 에르메스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광고를 유일하게 게재하는 잡지이며 무라카미 하루키, 사카모토 류이치, 스튜디오 지브리를 특집으로 다룬 유일한 잡지이기도 합니다.
BRUTUS는 보통 한 권을 1~2명의 편집자가 책임집니다. 회의도, 프레젠테이션도 없이 모든 것을 편집자의 감각과 개성에 맡기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BRUTUS는 편집자의 색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매우 독특한 잡지입니다.
HA : 일본에서는 잡지가 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해왔고 일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잡지 문화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SHIMIZU : 일본의 잡지 문화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2000년대까지는 잡지가 유행을 주도하고 기록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정말 다양한 주제의 잡지가 발행되는데요, 예를 들어 자동차 차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도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처럼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잡지가 존재하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콘텐츠의 퀄리티도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잡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해외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POPEYE와 BRUTUS는 그러한 흐름의 시작점에 있었죠. 잡지는 텔레비전과 달리 비교적 적은 인원으로 제작이 가능합니다. 사진가와 편집자만 있으면 하나의 잡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흥미로운 정보를 발굴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다채로운 정보가 일본 잡지에 모이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HA : 과거에는 일본의 선진 문화가 한국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 문화를 흥미롭고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낸 한국 문화의 매력은 어떤 부분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SHIMIZU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의 콘텐츠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정제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콘셉트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작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에서는 다소 약한 면이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한국의 콘텐츠는 다양한 요소를 가볍고 유연하게 믹스하면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행력을 바탕으로 순수하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는 한국 문화의 큰 강점이며 일본인들에게도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HA : 이번 한국 특집호를 준비하며 한국의 여러 지역을 직접 취재하셨습니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도시들을 방문하셨는데 한국의 지역 문화에 대해 느낀 점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SHIMIZU :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잘 발달된 식문화였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일본 내에서도 흥미로운 지역에는 그곳만의 독특한 식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점에서 한국 역시 지역마다 고유한 식문화가 다양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HA : 그렇군요, 일본은 오래전부터 지역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적 지원을 통해 지역 발전을 이뤄왔습니다. 콘텐츠를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셨을 때 한국의 지역 문화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무엇인가요?
SHIMIZU : 일본에서는 2000년대 무렵부터 ‘지방 이주’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도쿄에 모든 것이 집중된 문화였지만 버블 붕괴 등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 지방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정부 또한 ‘지방 창생’을 주요 정책 기조로 삼고, 관련 예산을 투입하며 이러한 흐름을 지원해왔습니다. 물론 지방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창작자들에게는 자신만의 속도와 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 지방의 환경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흥미로운 도시로는 모리오카, 가고시마, 가가와, 도야마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HA : 일본 문화는 예로부터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특히 예술, 패션, 건축 등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요. 일본 문화가 지닌 힘과 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SHIMIZU : 이건 취재 중 하상욱 디렉터님이 추천해 주신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읽고 느낀 점인데요, 일본 사람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부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나라였다면 그런 디테일에까지 신경 쓰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여겨져 쉽게 넘어갔을지도 모르죠. (혹은 아예 배제되었을 수도 있고요.)
일본에는 “아름다움은 디테일에 깃든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요소일수록 오히려 더 본질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고 믿고 그에 정성을 기울이는 태도에서 일본 문화의 미학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오타쿠 문화 역시 그런 집요한 디테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HA : 팬데믹을 지나 탈세계화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협력하고 교류하며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상호 존중을 실천해 나갈 수 있을까요? 콘텐츠를 만들고 취재하는 입장에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SHIMIZU : 최근 몇 년 사이, 한국과 일본의 크리에이터들 간 교류가 정말 활발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이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또 서로의 강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장점들을 더 많이 나누고, 함께 공유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SHIMIZU : 요즘 일본에서는 음식, 패션, 음악, 영화, 드라마, 디자인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습니다. 이번 특집을 기획하게 된 주요한 배경이기도 한데요, 실제로 한국에 머무르시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체감하고 계시나요?
HA : 네, 물론입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 콘텐츠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작년과 올해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했었는데요, 단순히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SHIMIZU : 또한, 한국 콘텐츠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HA : 한국 콘텐츠는 다양성과 에너지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한국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 자기화하는 능력,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빠른 네트워크를 통해 전 국민이 공유한다는 점이 한국 콘텐츠의 가장 큰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지속 가능한 콘텐츠 개발과 보다 깊이 있는 접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SHIMIZU :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한국 문화에,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서로 높아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HA : 역사적으로 보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중학교 시절, 밀수된 일본 패션 잡지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80-90년대 조용필이나 2000년대 욘사마 열풍은 특정 세대의 특정 인물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요즘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가끔 일본 친구들이 한국을 찾아와 만날 때면,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심지어 존경까지 느껴질 때가 있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양국 예술인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류를 통해 탄생하는 콘텐츠가 기존과는 또 다른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SHIMIZU : 그리고 현재 일본 콘텐츠에 대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나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HA : 저는 일본 콘텐츠가 얄미울 정도로 그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답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부흥기 동안에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문화의 부흥을 이끌며 깊이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다음 세대에 전했습니다. 버블이 꺼진 이후, 일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도 예전만큼의 수요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런 고민의 시간을 거치며, 일본 콘텐츠는 디스토피아적인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해왔고, 지금의 일본 콘텐츠는 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규모를 줄이고 선배 세대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화해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려는 콘텐츠가 있는가 하면,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지나치게 노골적인 홍보 중심의 콘텐츠도 공존하는 것이 현재 일본 콘텐츠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SHIMIZU : Ascétique는 한국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문화에 기여하고 영향을 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HA : 아세티크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는 라이프 스타일숍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일반적인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최대한 독립적인 환경에서 저희의 가치관이 온전히 담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깊이 있는 접근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합니다.
라이프스타일 숍으로서 아세티크는 가능한 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해석이나 편집은 고객의 몫으로 남기려 하기 때문에 때로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다루는 모든 물건들은 이미 해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거나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것들입니다. 지금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름다움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역사적인 인물들의 방 한켠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모두가 쉽게 받아들이고 즉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물건을 권해야 할 때에도 저희는 그 이면에 담긴 숨은 이야기와 미학을 함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물건 하나로 그 사람을 알 수 있길 바랍니다.
SHIMIZU : 일본에서는 코로나 이전부터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방식의 창작 활동과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HA : 물론입니다. 대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이동해 자신의 속도에 맞춰 작업을 이어가는 분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지역에 정착해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이 관광 자원으로 발전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흐름에는 고속철도나 저가 항공 등 교통 인프라의 발전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도나 강원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고요. 앞으로도 이런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SHIMIZU : 그렇다면 아세티크의 기반이 된 도시, 진주만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또한 그곳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해가는 과정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도 함께 들려주세요.
HA : 진주는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의 도시입니다. 도시 한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지리산과 남해가 가까우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기에도 교통이 편리합니다.
지역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콘텐츠를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대도시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콘텐츠도 이곳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실험하고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가 좋은 콘텐츠를 찾아 대도시나 해외로 나가는 것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저는 콘텐츠는 결국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콘텐츠를 만들 때, 진주의 어떤 중년 남성이나 20대 여성, 주부, 학생들을 떠올리며 작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희는 진주 안에서도 홍보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라서 어떤 날은 오히려 진주보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한 발자국 물러서 묵묵히 콘텐츠를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진주 분들이 이 커뮤니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SHIMIZU : 이번에 전주도 함께 취재했는데 그곳에서도 20대 청년들이 도시의 문화를 바탕으로 매우 흥미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Ascétique처럼요.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한국의 지역 문화나 지방의 창작 생태계에 대해 어떤 가능성을 느끼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HA : 한국은 이미 서울과 그 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영향력은 인천과 경기도까지 뻗어 있어 한국 문화 전체가 곧 서울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울은 숨겨진 계급주의와 철저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은 기득권자의 도시이며, 새싹처럼 신선하고 여린 콘텐츠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생각하는 서울의 멋진 친구들조차 높은 임대료 부담 때문에 매장을 열기 어려워하고 팝업 스토어 형식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지역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지역 문화는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멕시코시티를 방문했을 때, 동네 카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가볍게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 하기 전 잠깐 들러 커피와 빵을 사곤 했습니다. 그런 일상 속에서 마주한 그들의 얼굴에서는 외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서울처럼 과밀화된 도시나, 반대로 인구 감소로 쇠퇴해가는 지방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런 공간들이 존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지역 문화는 단순한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 적극적인 지원과 노력을 통해 쟁취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 역시 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SHIMIZU : 저에게 한국의 풍경은 종종 영화 속 장면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도시의 풍경처럼요.
당신에게는 어떤 풍경이 ‘한국적’이라고 느껴지시나요?
HA : 솔직히 앞선 질문들에 답하면서는 다소 무겁거나 의무감이 드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만큼은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평소에 영화를 자주 보는 편입니다.(자주 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데, 특히 에릭 로메르와 미아 한센 뢰브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함께 만들어주신 시미즈 상도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짧게나마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질문에 답하려다 보니 시미즈 상이 좋아하는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과 이창동 감독, 홍상수 감독의 비교적 최근 작품들을 다시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미즈 상이 좋아하는 감독들은 소외되거나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풀어냅니다. 그래서 그곳의 풍경에는 꾸밈이 없습니다. 시미즈 상이 본 한국 영화의 장면들은 그들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한 단면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들이 바라본 한국은 소외되고 사라져갈 것들로 이루어진 어딘가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며 있는 풍경입니다. 그래서 문득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그런 한국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은 명절이면 참기름 짜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시장 사람들이 하루 종일 악다구니를 벌이다가도 저녁쯤엔 술 한잔에 취해 모든 걸 웃으며 넘기던 그런 정 많고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한국은 한동안 인적이 드물더니 요즘은 유난히 더 썰렁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끔 새벽이면 ‘과연 내 동생들과 자식들은 어떤 내일을 마주하게 될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곤 합니다. 과거 북적이던 시장통의 소란함도 지금의 스산한 거리의 차가움도 모두 한국적인 풍경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작은 희망을 쫓는 평범한 사람들이 한국적인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 에릭 로메르, 미아 한센 뢰브, 켈리 라이카트)
모두가 한국을 이야기하는 2025년.
이제는 하루라도 한국 콘텐츠를 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 ‘제4차 한류 붐’이라 불린 지도 벌써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YouTube와 SNS는 그동안 한국에 관심 없던 이들에게까지 콘텐츠를 전하고 TV와 신문은 정치와 엔터테인먼트를 다루며 Netflix의 한국 드라마는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NJZ(구 뉴진스)는 K-POP 팬이 아니던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이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고 해외여행지로서의 인기도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은 세대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흥미롭고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렇게 흥미로운 이웃나라가 있었구나’ 하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 역시 그런 깨달음을 느낀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번 특집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다시 돌아가 보고자 했습니다.
시차도 없고 도쿄에서 단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한국은 분명 일본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입견이 생기기 쉽고 오히려 사소한 차이점에 더 눈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2주 넘게 한국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여러 번 방문했던 저 자신조차도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라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특집에는 여행 가이드 정보도 많이 담았지만 해외 도시 특집으로는 드물게 텍스트 중심의 구성으로 제작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최대한 정성스럽게, 그리고 key Person들의 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페이지를 구성했습니다.
시간을 들여 읽어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한마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 영상 제작자인 이랑 씨가 인터뷰 중 들려준 말입니다.
「韓国に夢を抱かないでください」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지 마세요.
이 말은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들렸습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솔직한 이야기였고, 그것 또한 한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을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